금융.경제이론

생전엔 자산관리, 사후엔 상속…'유언대용신탁'에 자산가 몰린다

LBA 효성공인 2016. 1. 29. 15:59

떠오르는 부동산·금융 복합상품

생전엔 자산관리, 사후엔 상속…'유언대용신탁'에 자산가 몰린다


KEB하나은행 신탁계약액 작년말 기준 2500억 달해

부동산·법률시장 신수요…자산 절반 이상 건물·상가
임대관리업 시장 성장 기대…충정·바른 등도 자문 제휴                    
금융회사가 자산가의 재산을 대신 운용하다가 사후엔 계약에 따라 상속을 집행하는 ‘유언대용신탁’이 금융과 부동산을 융합한 틈새 상품으로 뜨고 있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본격적인 은퇴가 임박한 가운데 자식들의 상속 분쟁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수요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 상품의 등장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자산가들의 재산 중 부동산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높아 빌딩 임대차 관리, 리모델링, 중개 등의 부동산서비스 시장도 함께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상속 갈등 막는 데 적합” 

70대 초반인 A씨는 서울 강남구에 있는 50억원대 빌딩을 자녀 세 명에게 증여하려다 보류했다. 재산을 물려준 뒤 자녀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생전에 자신이 임대료를 받고 사후엔 미리 정한 비율대로 금융회사가 상속인들에게 임대료를 나눠주는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지난해 맺었다. 장녀가 55세가 되면 건물을 팔아 나눠 갖도록 특약조항도 넣었다. 일종의 ‘불효 방지 신탁’인 것이다.

60대 후반인 B씨도 늦둥이 중학생 아들이 걱정돼 은행에 아파트(시가 15억원)와 현금성 자산(10억원)을 신탁했다. 부부 사망 시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매월 300만원의 생활비를 지급하다 성인이 되면 원하는 시기에 계약을 해지하도록 했다. 

유언대용신탁은 금융과 부동산 자산관리에 상속을 결합한 고령화 상품이다. 국내에서는 2011년 신탁법 개정 전후로 상품이 출시됐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 말 누적 기준 KEB하나은행이 신탁계약 75건, 자산 규모 2500억원을 달성하면서 성장 잠재력이 재평가되는 분위기다. 급속한 고령화, 높아진 이혼율, 상속 분쟁 증가 등도 관련 시장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40~50대 문의도 급증 

이 제도 도입 초기에는 본인이 치매를 앓거나 자녀가 정상적인 상속인이 되기 힘든 자산가가 주로 이용했다. 그러나 최근 40대 후반~50대 자산가의 상담 신청이 크게 늘고 있다. 

배정식 전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2014년 대면상담이 154건이었는데 지난해 225건으로 늘었다”며 “계약자 평균 자산이 30억~40억원이지만 10억원 이하 고객도 있다”고 말했다. 상속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중장년층 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복잡한 유언 절차를 피하면서 자신의 의사대로 금융회사(수탁자)가 상속을 집행하는 것도 관심이 높아진 요인으로 꼽힌다. 이혼한 사위나 며느리를 견제하면서 손주에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한 ‘조손(祖孫) 연속승계’ 요구도 커지고 있다고 은행 관계자들은 말했다. 

오영표 신영증권 신탁부장은 “초기 단계지만 최근 고객이 먼저 문의해오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며 “작년 11월 말~12월 초 전국 영업직원을 대상으로 상품설명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부동산·법조계 미래 먹거리 기대 

유언대용신탁이 부동산업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중소형 빌딩관리업체인 글로벌PMC의 김용남 대표는 “작년 8월 국민은행, 지난 12월 신한은행과 업무제휴를 맺었다”며 “임대관리업계에 새로운 고객 창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민호 지에이디건축설계사무소 대표는 “은행 내부 인력만으로는 수요자의 부동산을 맞춤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건축사무소나 시공·컨설팅·인테리어 업체 등과의 협력이 필요해 최근 미팅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김앤장 태평양 바른 충정 화우 등 법무법인과 법률사무소 등도 상속 자문을 위해 금융사와 업무제휴를 맺거나 자체 세미나를 열고 있다.

■ 유언대용신탁 

遺言代用信託. 위탁자가 금융회사(수탁자)에 자산을 맡기고 운용수익을 받다가 사망 이후 미리 계약한 대로 자산을 상속·배분하는 계약. 법적으로 유언이 아니라 신탁으로 분류돼 유언이 갖춰야 할 엄격한 요건을 피하면서 재산을 자손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물려줄 수 있다. 2011년 신탁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이에 관한 판결이 있어 올려 봅니다
[판결] ‘유언대용신탁’ 법적성질은 ‘유언’ 아닌 ‘계약’

위탁자 마음 바뀌어도 계약 내용에 반하면 일방적 해지 못해



유언대용신탁을 한 위탁자가 '신탁계약 해지를 위해서는 수익자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특약을 했다면 위탁자도 신탁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없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유언대용신탁의 법적 성질은 피상속인이 언제든 내용을 변경·철회 할 수 있는 '유언'이 아닌 '계약'이기 때문에 피상속인이라도 계약 내용에 반해 해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2년 신탁법 개정으로 도입된 '유언대용신탁'은 피상속인이 생전에 금융기관과 신탁계약을 맺어 사후 재산 분배 등을 맡기는 제도다. 피상속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금융기관이 피상속인이 신탁한 예금과 채권, 부동산 등 자산 관리를 맡고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그 금융기관이 신탁계약의 내용에 따라 재산을 상속 집행한다. 복잡하고 엄격한 요건과 절차를 따지는 유언에 비해 신탁계약을 통해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상속계획을 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민사2부(재판부 박주현 부장판사)는 치매 증상이 있는 전모(70대·여)씨가 ㈜하나은행(소송대리인 법무법인 바른)을 상대로 "유언대용신탁계약을 해지하니 재산을 돌려달라"며 낸 신탁계약 무효소송(2015가합71115)에서 최근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위탁자인 전씨가 하나은행과 신탁계약을 맺을 때 사후 수익자인 자신의 딸 4명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정했는데 이러한 계약을 헌법이 보장하는 재산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신탁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전씨가 한 '인지기능검사 및 면담결과'를 보면, 전씨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며 "전씨가 신탁계약을 맺을 당시 치매때문에 의사무능력 상태에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수익자 전원 동의 얻어야 계약 해지' 특약
헌법이 보장하는 재산권 침해로 볼 수 없어
고양지원, 원고패소 판결
 
전씨는 지난해 8월 자신이 가진 부동산과 현금 9억원을 '생전에는 내 생활비와 병원비로 사용하고 사후에는 4명의 딸에게 똑같이 나눠준다'는 유언대용신탁계약을 하나은행과 체결했다. 치매 증상이 있던 전씨는 신탁계약을 해지·변경하기 위해서는 수익자인 딸 4명의 동의를 모두 얻어야 한다는 특약을 걸었다.

하지만 전씨는 5개월 뒤 마음이 바뀌어 "신탁계약 체결 당시에 이미 치매 환자로 신탁계약의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수익자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만 신탁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재산권 행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헌법상 보장된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신탁계약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씨와 계약을 맺은 하나은행은 "유언대용신탁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됐고 만약 계약이 무효가 되면 치매에 걸린 전씨를 대신해 재산에 욕심있는 딸 중 한 명이 마음대로 재산을 사용할 우려가 있다"며 계약해지를 거부했다.

하나은행을 대리한 김상훈(42·사법연수원 33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위탁자가 계약 당시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특약을 설정했기 때문에 위탁자라 하더라도 계약의 내용에 반해 계약을 해지 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한 최초의 판결"이라며 "이 판결이 유언대용신탁과 관련한 소송에서 리딩케이스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전씨는 이 판결에 불복, 항소해 서울고법 민사30부(재판장 이진만 부장판사)가 사건을 심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