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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분야별 중요판례분석] 4. 민법(下)

LBA 효성공인 2019. 2. 7. 19:19

[2018년 분야별 중요판례분석] 4. 민법(下)

장기계속공사계약, 공사기간 연장이유 간접공사비 청구 못해
공인에 '극우' '종북' 표현만으로 명예훼손 인정 할 수 없어

권영준 교수 (서울대 로스쿨)   


 

1. 금액이 다른 채무가 서로 부진정연대 관계에 있을 때 다액채무자가 일부 변제를 하는 경우의 법률관계(대법원 2018. 3. 22. 선고 2012다74236 전원합의체 판결) 

   

(1) 사안

  피고(개업공인중개사)에게 고용된 소외인(중개보조원)은 임대인에게 주어야 할 임대차보증금 및 임대인으로부터 대출금상환에 사용해 달라고 받은 수수료를 횡령하였다.

그 후 소외인은 피해자인 임대인에게 일부 금액을 변제하였다.

 원고는 공인중개사법 제30조 제1항에 따라 피고에게 잔존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를 하였다.

1심법원은 원고의 과실을 50%로 보아 과실상계를 하였다.

그 결과 피고는 소외인에 비해 소액의 손해배상채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액채무자인 소외인의 일부 변제가 소외인과 피고가 연대하여 부담하는 부분(이하 ‘공동부담부분’)과 소외인이 단독하여 부담하는 나머지 부분(이하 ‘단독부담부분’) 중 어느 부분을 소멸시키는지 문제되었다.

(2) 판결 요지

  금액이 다른 채무가 서로 부진정연대 관계에 있을 때 다액채무자가 일부 변제를 하는 경우,

당사자의 의사와 채무 전액의 지급을 확실히 확보하려는 부진정연대채무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단독부담부분이 먼저 소멸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법리는 사용자의 손해배상액이 피해자의 과실을 참작하여 과실상계를 한 결과 타인에게 직접 손해를 가한 피용자 자신의 손해배상액(중개보조원)과 달라졌는데

다액채무자인 피용자가 손해배상액의 일부를 변제한 경우, 공동불법행위자들의 피해자에 대한 과실비율이 달라 손해배상액이 달라졌는데 다액채무자인 공동불법행위자가 손해배상액의 일부를 변제한 경우에 모두 적용된다.

 중개보조원을 고용한 개업공인중개사의 공인중개사법 제30조 제1항에 따른 손해배상액이 과실상계를 한 결과 거래당사자에게 직접 손해를 가한 중개보조원 자신의 손해배상액과 달라졌는데 다액채무자인 중개보조원이 손해배상액의 일부를 변제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3) 분석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측설,
외측설,
과실비율설,
안분설이 대립하였다.

판례는 사용자책임과 공동불법행위책임으로 인한 부진정연대관계에는 과실비율설을 취하였으나,
그 외의 부진정연대관계(예컨대 계약책임과 불법행위책임의 경합)에는 외측설을 취하였다.

외측설에 따르면 다액채무자의 단독부담부분부터 소멸되는 반면,
과실비율설에 따르면 소액채무자와의 공동부담부분도 소액채무자의 과실비율에 상응하는 만큼 함께 소멸된다.

과실비율설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 손해의 공평한 분담이라는 과실상계 제도의 본래 취지를 확장하여, 채권자와 소액채무자 사이에 다액채무자의 무자력 위험을 분담시키는 데에도 과실비율을 활용한다.

그러나 이는 과실상계를 중복 적용함으로써 다액채무자의 무자력에 대한 위험 일부를 채권자인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결국 채권자를 보호하려는 부진정연대채무의 취지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일부 유형에 관하여만 과실비율설을 적용할 근거가 없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대법원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여 과실비율설에 기한 종래 판례를 폐기하고, 외측설로 통일하였다.

다액채무자와 소액채무자가 부진정연대관계에 있는 경우 다액채무자의 일부 변제가 어떤 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직접 규율하는 규정은 없다. 안분설은 변제충당에 관한 민법 규정을 유추 적용하여 이 문제를 규율하고자 하나, 이 문제와 변제충당 상황은 유추 적용을 정당화할만큼 충분히 유사하지 않다.

결국 이러한 경우에는 연대채무 관련 규정들 배후의 법 정신, 즉 채권자 보호라는 법 정신을 좀 더 충실히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성을 반영한 입장이 외측설이다.

또한 외측설은 변제자인 다액채무자와 변제수령자인 채권자의 일반적 의사에도 모두 부합한다.

소액채무자의 일반적 의사는 다를 수 있으나, 그는 변제관계의 직접 당사자가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상판결은 부진정연대관계의 유형을 불문하고 외측설이 타당하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2. 체육필수시설 인수인의 권리·의무 승계 여부 (대법원 2018. 10. 18. 선고 2016다220143 전원합의체 판결)
 
(1) 사안

  골프장 운영자인 A회사는 골프장 관련 대출채무 담보를 위해 골프장 부지 및 시설에 담보신탁을 설정하고

채권자인 금융기관들을 우선수익자로 지정하였다.

이후 A회사가 대출채무를 이행하지 않자 담보신탁계약에서 정한 바에 따라 신탁 목적물인 골프장 부지 및 시설에 관한 매각 절차가 진행되었고, 피고회사가 이를 인수하였다.

 그러자 골프장 회원인 원고들은 피고회사가 A회사의 원고들에 대한 입회금반환채무를 인수하였다고 주장하며 피고회사를 상대로 입회금반환을 구하였다.

(2) 판결 요지

 '체육시설의 설치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하 ‘체육시설법’) 제27조 제1항은 체육시설업자의 상속인, 합병 후 존속 또는 신설법인, 영업양수인은 체육시설업의 등록 또는 신고에 따른 권리·의무를 승계한다고 정하고,

제2항은 경매, 도산법상 환가, 국세징수법 등에 따른 압류재산 매각, 기타 이에 준하는 절차에 따라 체육필수시설을 인수한 자에게도 제1항을 준용하고 있다.

 한편 체육필수시설에 관한 담보신탁계약이 체결된 다음 그 계약에서 정한 공매나 수의계약으로 체육필수시설이 일괄 이전되는 경우에도 체육시설법 제27조의 문언과 체계, 입법 연혁과 그 목적, 담보신탁의 실질적인 기능 등에 비추어 체육필수시설의 인수인은 체육시설업자와 회원 간에 약정한 사항을 포함하여 그 체육시설업의 등록 또는 신고에 따른 권리·의무를 승계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인수인인 피고회사는 원고들에게 입회금반환채무를 부담한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었다.

(3) 분석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승계긍정설
 승계부정설이 대립하고 있었고,

법제처는 승계긍정설에 따라 유권해석을 한 바 있었다.

이는 담보신탁에 근거한 매각절차가 체육시설법 제27조 제2항 제4호의 '그 밖에 제1호부터 제3호까지의 규정에 준하는 절차'에 포함된다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법률해석의 출발점은 문언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문언에서 얻을 수 있는 실마리는 제4호의 절차가 제1호 내지 제3호의 절차와 유사해야 한다는 점 정도이다.

한편 법률해석을 할 때에는 입법자의 의사나 법률의 목적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입법자의 의사나 법률의 목적은 체육시설 회원들의 권익을 충실히 보호하는 것이다.
대상판결은 이를 고려하여 담보신탁에 근거한 매각절차도 제4호의 절차에 해당한다는 ‘넓은 해석론’을 채택하였다.

‘넓은 해석론’과 ‘좁은 해석론’ 어느 쪽이건 각각 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입법자의 의사나 입법 목적에 비추어 제27조 제2항 제1호 내지 제3호에 규정된 절차들에 숨겨진 공통 핵심 요소를 발견하고, 담보신탁 매각절차에도 그 요소가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제27조 제1항에 규정된 상속, 영업양도, 합병의 공통 핵심 요소가 ‘체육시설 운영자의 포괄적 지위 이전’이라면,

■제27조 제2항 제1호 내지 제3호에 규정된 절차의 공통 핵심 요소는 ‘체육시설 운영자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라 채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환가 절차’이다.

담보신탁에 따른 매각절차도 이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와 마찬가지로 취급할 수 있다.

입법론적으로는 체육시설 회원(주로 골프장 회원)에게 이처럼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있으나,
 헌법재판소는 이 법의 합헌성을 인정한 바 있다(2009헌바197).

대상판결로 인해 골프장 업계에 미칠 파급효과는 만만치 않을 것이나 이는 제도 정비나 입법을 통해 해결할 문제이다.

 한편 대상판결에 따르면 골프장 운영자 도산 시 그 도산 효과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담보신탁 수익자가 그 도산으로 인한 부담(즉 입회금반환채무 승계)을 떠안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담보신탁의 도산격리효과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체육필수시설의 인수라는 특정 상황에 체육시설법 규정을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나타난 법 현상일 뿐이다.


3. 장기계속공사계약에서 총공사기간이 연장된 경우 총공사대금 조정 가부(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235189 전원합의체 판결)

 (1) 사안

  원고들은 피고 서울시의 요청에 따라 피고 대한민국 산하 조달청장과 지하철 7호선 연장공사에 관한 장기계속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그 이후 국토해양부장관의 기본계획 변경으로 총 공사기간이 연장되었다.

원고들은 피고 서울시에게 총 공사기간 연장을 이유로 간접공사비가 추가 지출되었다면서 총괄계약에 기한 계약금액 조정을 요청하였으나,

피고 서울시는 공기연장 비용이 이미 연차별 계약금액에 포함되어 있다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원고들은 주위적으로는 피고 대한민국, 예비적으로는 피고 서울시를 상대로 총공사기간 연장에 따라 증가한 간접공사비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2) 판결 요지

  총괄계약은 그 자체로 총공사금액이나 총공사기간에 대한 확정적인 의사의 합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각 연차별 계약 체결에 따라 연동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장기계속공사계약의 당사자들은 총괄계약의 총공사금액 및 총공사기간을 각 연차별 계약을 체결하는 데 잠정적 기준으로 활용할 의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보이고,

 각 연차별 계약에 부기된 총공사금액 및 총공사기간 그 자체를 근거로 하여 공사금액과 공사기간에 관하여 확정적인 권리의무를 발생시키거나 구속력을 부여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 따라서 총괄계약의 효력은 ★계약상대방의 결정(연차별 계약마다 경쟁입찰 등 계약상대방 결정 절차를 다시 밟을 필요가 없다), ★계약이행의사의 확정(정당한 사유 없이 연차별 계약의 체결을 거절할 수 없고, 총공사내역에 포함된 것을 별도로 분리발주할 수 없다), ★계약단가(연차별 계약금액을 정할 때 총공사의 계약단가에 의해 결정한다) 등에만 미칠 뿐이고,

 계약상대방이 이행할 급부의 구체적인 내용, 계약상대방에게 지급할 공사대금의 범위, 계약의 이행기간 등은 모두 연차별 계약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총괄계약에 따른 총공사금액 조정은 별도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었다.

(3) 분석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1년 단위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므로,

 별도로 계속비의결을 얻지 않는 한 수 년에 걸친 장기계속공사계약은 여러 개 연차별 계약으로 나누어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역시 하나의 공사에 관한 하나의 계약인데

예산제도의 제약 때문에 여러 개 연차별 계약으로 나누어 체결하는 것일 뿐이다.

이때 전체 공사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연차별 계약과 대비하여 총괄계약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장기계속공사계약은 '총괄계약(기본계약) + 연차별 계약(개별계약)'의 이중 구조를 띤다.

 총괄계약은 입찰과정에서 확정된 총공사금액, 총공사기간 등을 제1차년도 계약서에 부기하는 방식으로 체결된다.

그런데 총공사기간 연장 등으로 간접공사비(예 : 현장사무소 및 그 인력 운영비용 등)가 추가 지출된 경우 이를 공사대금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이때 연차별 계약의 연차별 공사대금을 조정하는 방법 외에 총괄계약의 총 공사대금을 조정하는 방법도 가능한지가 문제된다.

이에 관한 하급심의 입장은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상판결이 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대법원은

총괄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총공사대금과 총공사기간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하여

총괄계약에 기한 총공사대금 조정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총괄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이상 총괄계약의 핵심 요소인 총공사대금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물론 총공사대금은 여러 변수로 인해 사후에 변경될 수는 있다.

그러나 사후적 변경가능성과 총괄계약의 확정성은 구별해야 할 개념이다.

 위험배분의 일반 원리나 채권자지체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에도

 발주자 측 영역에서 발생한 위험은 발주자가 인수하는 것이 공평하고 합리적이다.

 대상판결에 따르면 이때에도 연차별 계약의 틀로 해결할 수 없는 간접공사비는 고스란히 계약상대자가 떠안아야 한다.

 반면 계약상대자의 영역에서 발생한 위험에 대해서는 지체상금이 부과된다.

이러한 결과가 국가계약법이 구현하고자 하는 계약의 대등성과 등가성의 이념과 맞는지 의문이다.(결국 국가가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가 됨) 


4. 정치적 논쟁에 관한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61654 전원합의체 판결) 

(1) 사실관계

  원고 1은 통합진보당 대표이고,

원고 2는 원고 1의 남편이자 변호사이다.

 피고 1은
 ‘주간 미디어 워치’를 창간한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 “원고들은 경기동부연합 그 자체이다”,
 ●“경기동부연합은 종북·주사파이다”,
●“원고 2는 경기동부연합의 브레인이자 이데올로그이고, 종북파의 성골쯤 되는 인물이다”,
● “원고 2 등이 원고 1에게 대중선동 능력만 집중적으로 가르쳐 아이돌 스타로 기획하였다” 등의 글을 게재하였다.

원고들은 피고 1 등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위자료 및 정정보도 게재를 청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

(2) 판결 요지

  타인에 대하여 비판적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정치적 논쟁이나 의견 표명과 관련하여서는 표현의 자유를 넓게 보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표현행위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사용된 표현뿐만 아니라 발언자와 그 상대방이 누구이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극우’든 ‘극좌’든, ‘보수우익’이든 ‘종북’·‘주사파’든, 그 표현만을 들어 명예훼손이라고 판단할 수 없고,

그 표현을 한 맥락을 고려하여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공론의 장에 나선 전면적 공적 인물의 경우에는 비판을 감수해야 하고 그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해명과 재반박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

 발언자의 지위나 평소 태도도 그 발언으로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는지 판단할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사건 표현행위는 의견 표명 내지 구체적 정황 제시가 있는 의혹 제기에 불과하여 불법행위가 되지 않거나,

원고들이 공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위법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명예훼손과 별개로 모욕이나 인신공격적 표현이 불법행위가 될 수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있었다.

(3) 분석

표현의 자유는 시민의 자율적 정치참여를 통한 참여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한다.

그런데 '시민'의 '참여'가 강조될수록 표현의 자유에서 사법 자제가 가지는 의미도 강조된다.
즉 표현의 자유를 넓게 보호한다는 것은 민주적 담론의 장에서 시민의 지분을 넓히고 그만큼 사법부를 포함한 국가의 지분을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의 정치이념에 관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다룬 사건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가장 강하게 보호할 대상이다.

 미국 연방대법원 Brennan 대법관은 New York Times 판결에서 "공적 문제에 관한 논쟁은 무제한적이고, 강렬하며, 널리 공개되어야 하고,

그 논쟁은 정부와 공직자에 대한 격렬하고 신랄하며 때로는 불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을 포함할 수도 있다"라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한국논단 사건(2000다37524)을 계기로 우리 판례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표현 주체와 정치적 담론의 장이 다양화되고 정치적 표현을 수용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성숙성이 제고되면서, 정치적 표현에 대한 사법적 개입의 필요성도 줄어들고 있다.

대상판결은 이러한 정치적 표현에 대한 강한 보호의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상판결에서는 발화자의 정치적 또는 철학적 입장에 기초하여 그들의 발언을 차별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 중립성도 강조되었다.

물론 정치인도 공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그들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 지켜져야 할 표현의 품격과 감정적 수위가 있다. 이러한 인격적 이익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어디까지인가는 명예훼손과는 별도의 맥락에서 추가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5.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1) 사실관계

  원고들(또는 그 피상속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되어 피고회사의 전신인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다 귀국하였다.

원고들은 일본에서 피고회사를 상대로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다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이유로 패소확정되자 다시 한국에서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1심법원과 원심법원은 시효만료를 이유로 청구를 기각하였으나,

 2012년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소멸되었을 뿐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피고회사의 소멸시효 항변은 신의칙에 반한다고 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2009다68620).

 대법원은 이에 따른 환송 후 원심판결에 대한 피고회사의 상고를 기각하여 종전에 이루어진 대법원의 판단을 유지하였다.

(2) 판결 요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인 점,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과와 전후 사정들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이는 점,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불분명한 점,

청구권협정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원고들이 주장하는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소멸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개 별개의견과 반대의견이 있었다.

(3) 분석

  대상판결은 청구권협정 제2조의 해석 문제로 귀착된다.

청구권협정은 양국 간 청구권 문제 뿐만 아니라 일방 국가와 상대국 국민 간 청구권 문제도 해결하려고 한 조약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조약 체결의 전후 과정에 비추어 보면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하여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까지 소멸시키기로 하는 양국 간의 명확한 상호 이해와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대법원이 제시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양국은 큰 틀에서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자금의 구체적인 법적 성격에 대해서는 일단 추상적 문언으로 봉합한 뒤 동상이몽(同床異夢) 또는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 내지 주장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이견합의(異見合意)였던 셈이다.

청구권협정 제2조는 양국과 양국 국민 간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하는 한편,

이러한 '모든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해결 대상이 된 '모든 청구권'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양 국가와 양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청구권(가령 일반적인 대여금채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해석을 통해 확정되는 특정한 범주의 '청구권'에 속하는 모든 청구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청구권'의 범주가 무엇인가에 관한 해석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조약의 해석 과정에서 불명확성이 존재한다면, 그 조약 내용은 가급적 국제법상 보호되는 보편적 인권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법률 해석에 불명확성이 존재하면 헌법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계약 해석에 불명확성이 존재하면 가상의 합리적 당사자의 합리적 의사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점들에다가 선례(이 사건의 경우 환송판결)는 가급적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대법관들은 방법론을 달리하였을 뿐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고통 받은 피해자 구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였다.

 다수의견은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다만 이러한 사법적 구제가 피해자 전체에 얼마나 실효적 구제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피해자군 전체의 실제적 구제는 사법(司法)의 영역을 넘어서서 입법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영준 교수 (서울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