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호화폐 압류에 있어 거래소와 전자지갑의 차이
암호화폐 거래소가 보편화됨에 따라 신종 보이스피싱 수법이 등장했다. 피해자를 속여 암호화폐 거래소 계좌에 원화를 입금토록 한 후, 이를 암호화폐로 바꿔 거래소 바깥의 전자지갑으로 빼내는 것이다.
암호화폐로 교환된 편취금전이 거래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피해자는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을까. 예컨대 편취금전이 은행 계좌에 입금되어 있다면 피해자는 재빨리 은행에 지급정지신청을 하고 예금반환채권을 가압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해 갖는 암호화폐 출금채권 또한 가압류의 대상이 될 것이다(다만, 지급정지신청의 경우 별도의 근거법률이 필요하다). 암호화폐 거래소가 은행처럼 제3채무자로서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전제는 붙지만, 여기에 필요한 암호화폐 거래소 등록제, 거래계좌 실명제 등 제도적 기반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를 제3채무자로 삼아 가압류 집행을 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편취금전이 거래소를 떠나 외부의 전자지갑으로 송금 되어버렸다면 어떨까? 이 경우 거래소라는 중앙 통제기관이 없어져 법적 의무를 지울 제3채무자가 없다. 같은 암호화폐라 할지라도 거래소 안에 보관되어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에 따라 법적 취급이 달라진다.
전자지갑은 암호화폐 네트워크에 마련된 가상공간이다. 암호화폐 네트워크는 전세계 불특정 다수의 참여 컴퓨터들이 미리 프로그램 된 절차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암호화폐 송금장부의 신뢰성을 유지하는 일종의 무인시스템이다. 중앙 관리자가 없다는 의미에서 탈중앙화(decentralized)되어 있다고 일컫는다. 비트코인 프로그램을 짠 나카모토 사토시(Satoshi Nakamoto)조차 관리자 권한이 없어 특정 전자지갑에 들어있는 비트코인을 지급금지 시키거나 다른 전자지갑으로 강제 이체시킬 수 없다. 이처럼 암호화폐 네트워크에게 제3채무자로서의 법적 의무를 관철시킬 수단은 마땅히 없다.
물론 전자지갑 주인(채무자)의 협조를 얻어 암호화폐를 받아올 수는 있다. 최근 비트코인 형태의 범죄수익을 압수한 사례에서는 ‘피고인이 진술한 전자지갑의 주소 및 개인키를 이용해 당해 비트코인을 수사시관이 생성한 전자지갑에 송금’했다고 한다(대판 2018.5.30. 2018도3619). 민사집행에서도 유사한 시도를 할 여지가 있다.
여기에서 법률적 쟁점이 발생한다. 암호화폐의 법적 성질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거래소에 보관된 암호화폐의 경우 이용자가 이를 출금할 권리를 '채권'으로 보는데 큰 의문이 없다. 채권의 목적 급부는 법정화폐에 국한되지 않으며, 암호화폐 거래소를 채무자의 지위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의 법적 성질이다. 암호화폐 네트워크를 채무자 지위에 놓을 수 없는 이상 ‘채권’은 아니다. 그렇다면 민법상 '물건'인가. 나아가 동산, 부동산, 채권 등에 관한 민사집행 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가? 만약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를 위 재산의 유형에 포섭시키는 법 해석이 가능하다면 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강제집행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특별법이 마련되기 전까지 암호화폐는 재산법 질서의 사각지대가 될 것이다. 필자는 전자와 같은 법 해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암호화폐 보유자에게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원칙을 현행법 해석으로써 얼마큼 관철시킬 수 있을지 살펴본다.
2.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가 민법상 '물건'인가
본고에서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란, 이를 송금하기 위해 다른 법적 주체(예: 암호화폐 거래소)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그 주인이 암호화폐 네트워크에 대해 직접 '송금 지시'를 내리는 것을 지칭한다. 웹 지갑, 데스크탑 지갑, 하드웨어 지갑과 같이 전자지갑 주소(공개키) 및 비밀번호(개인키) 등의 생성·관리만을 도와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경우에도 이 범주에 속한다.
암호화폐는 시중에서 화폐 또는 유가증권처럼 유통되면서 소유권을 비롯한 ‘물권’의 객체로 다뤄진다. 암호화폐가 물권의 객체라면 이것은 민법상 '물건'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물권은 '물건'뿐만 아니라 다른 재산권(채권, 지적재산권 등)을 객체로 해서도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암호화폐를 민법상 물건으로 보는 것이 가장 간명하다고 생각한다.
민법 제98조는 물건을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으로 정의한다. 민법이 물건의 외연을 유체물로 한정하지 않고 관리 가능한 무체물까지 포함시킨 이유는 이것이 거래의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거래의 대상이 되려면 독립된 물건으로서 '특정' 가능해야 하고 사람에 의해 '배타적으로 지배'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자연발생적인 전기는 그러하지 않지만, 전력망을 통해 수송하는 전기는 이것이 가능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컴퓨터에 저장된 일반적인 정보인 '파일'의 경우 특정은 가능하지만 똑같은 것을 쉽게 복제할 수 있어 한 사람이 배타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것은 민법상 물건으로 보기 곤란하다(창작성 등을 구비했을 때 저작물로서 보호받는 것은 별론).
한편, 암호화폐도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의 일종이지만, 이는 유체물과 비견될 만한 특정성과 배타적 지배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개별 전자지갑에는 공개키(public key)라는 고유 주소가 부여된다.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는 당해 전자지갑의 개인키(private key)라는 비밀번호를 가진 자만이 출금할 수 있다. 인터넷뱅킹에서 공인인증서와 그 비밀번호를 보유한 자만이 계좌이체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암호화폐를 출금한다는 것은 다른 전자지갑으로 송금한다는 뜻인데, 이를 '송금지시'라 한다(그 반대급부로서 송금자는 재화·용역을 제공받을 것이다). 암호화폐를 보낸 전자지갑은 송금액만큼 잔액이 줄고 받은 전자지갑은 그만큼의 잔액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러한 송금내역은 전세계 참여 컴퓨터들에게 실시간 전파되어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에 빠짐없이 기록된다. 이것이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에 한 번 기록된 내용은 현재 기술로는 사실상 위·변조 불가능하다는 점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이로 인해 암호화폐는 임의로 복제(어느 전자지갑에서 한 번 출금된 암호화폐를 이중으로 출금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현대 암호이론에 의해 보장된 암호화폐 관리체계의 신뢰성은 국가와 은행에 필적한다고 시장에서 평가되고 있다. 덧붙이면, 그간 암호화폐 거래소 해킹 사고는 모두 출금용 개인키를 도둑 맞은 것이었고(이는 인터넷뱅킹 공인인증서와 비밀번호를 도난 당한 것과 흡사하다). 블록체인 자체가 위·변조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다.
요컨대, 암호화폐 네트워크상의 모든 암호화폐는 어느 전자지갑에 귀속되어 있는지가 특정 및 공시되어 있고, 그 전자지갑의 개인키 보유자에 의해 배타적으로 지배되므로, 민법상 물건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사료된다.
3. 맺으며 -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를 어떻게 압류하는가
전자지갑에 보관된 암호화폐를 '물건'으로 볼 경우 민사집행법 제189조 제1항에 따른 동산압류 집행을 시도해볼 수 있다. 물건은 동산과 부동산으로 양분되는데, 암호화폐는 적어도 부동산은 아니다.
위 조항 본문에 따라 집행관이 암호화폐를 점유(국가가 관리하는 전자지갑으로 송금)하는 방법으로 압류하려면, 채무자가 전자지갑의 개인키를 순순히 알려주거나, 혹은 채무자가 개인키 관리를 매우 허술하게 해서 그 주거 또는 PC에서 개인키가 발견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므로, 개인키를 내놓지 않는 채무자에게 간접강제를 부과하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위 조항 단서에 따라 채무자에게 암호화폐를 잠정 보관시키되 처분을 금지시키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전자지갑의 공개키는 계좌번호에 대응되는 정보로, 비트코인을 비롯한 다수의 암호화폐는 공개키를 알면 그 전자지갑의 입출금 내역을 누구나 조회할 수 있다. 이는 분산원장이 불특정 다수의 참여자들에게 공유됨에 따른 특성이다. 이를 이용해 채무자의 임의처분을 감시할 수 있는데, 압류집행 시점에서 전자지갑 공개키 주소와 함께 그 잔액을 기록해 두고(이것이 봉인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향후 그 전자지갑의 잔액이 줄어들면 채무자가 봉인표를 훼손하고 압류물을 처분한 것으로 보아 형법 제140조 제1항 공무상봉인등무효죄로 처벌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처분금지 다음 단계인 추심으로 나아가려면 채무자의 개인키를 알아내야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결론적으로, 국가라고 해서 채무자의 의사에 반해 전자지갑의 개인키를 알아낼 일반적인 수단이 없는 이상 ‘국가권력이 개입해 채무변제를 강제로 실현한다’는 강제집행의 본질적 요소를 관철할 수단이 간접강제 이외에는 마땅히 없다. 결국 암호화폐가 거래소로 옮겨져 법정화폐로 교환되려는 시점을 기다려 강제집행의 기회로 삼는 것이 비교적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사료된다.
전승재 변호사(법무법인 바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