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아버지의 신분증 등을 이용해 서류를 위조하고 대부업체로부터 대출을 받았다면 명의를 도용당한 아버지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딸의 행위는 무권대리(無權代理)에 해당하고 아버지가 대출금 이자를 일부 갚았더라도 무권대리의 추인(追認)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심병직 판사는 A씨가 B사 등 대부업체 3곳을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소송(2016가단5089703)에서 "A씨와 대부업체 사이의 대출거래계약에 따른 대출금 채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최근 원고승소 판결했다.
A씨의 딸 C(20)씨는 2013년 8월 인터넷을 이용, B사에 아버지 명의로 대출신청을 한 후 아버지의 주민등록초본, 신분증 사본 등을 팩스로 송부했다. 이후 C씨는 B사로부터 대출거래계약서 양식을 받아 아버지의 성명을 기재하고 서명하는 방법으로 대출계약서를 위조해 아버지 명의 계좌로 500만원을 입금받았다. C씨는 2015년 8~10월 같은 수법으로 다른 대부업체 두 곳에서 2000만원과 100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지난해 4월 "딸이 권한 없이 B사 등과 대출계약을 체결했다"며 소송을 냈다. B사 등 대부업체들은 "우리 직원이 2014년 5월 A씨와 통화해 대출금 채무가 있다고 알려 줬다"며 "이후에도 A씨가 이자를 입금하는 등 거래를 지속해 C씨의 무권대리 행위를 추인했다고 봐야 한다"고 맞섰다.
심 판사는 판결문에서 "무효행위 또는 무권대리 행위의 묵시적 추인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그 행위로 처하게 된 법적 지위를 충분히 이해하고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승인한 것으로 볼 만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A씨가 B사 직원으로부터 대출금 채무가 있다는 것을 전화로 통지 받고 지난해 4월까지 B사에 대출금 채무의 이자를 지급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 같은 사정만으로 A씨가 C씨의 무권대리가 있음을 알고 그 행위의 효과인 대출금 채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표시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A씨 명의의 대출계약은 C씨가 관련 서류를 위조해 B사 등과 체결한 것으로 그 효력이 A씨에게 미칠 수 없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