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
이태 전 시집보낸 막내가 집을 샀다는 반가운 소식을 보내왔다. 집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너무 오랫동안 셋방살이로 전전했고, 동료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퇴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서민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다. 그리고 퇴직을 하면서 몇 푼을 더 보태어 조금 넓은 공간으로 옮겨와 살고 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했길래 집 한 채도 못 가졌소.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더욱 없다.
막내딸은 이름을 안나(晏娜)로 지었다.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세례명(洗禮名)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행(幸)인지 불행(不幸)인지 알 수 없지만 딸 셋을 두었다. 선친(先親)께서 두 아이의 이름을 짓고 세 번째 딸을 낳았다는 소식에 이름은 너 알아서 지어라 해서 애를 더 낳지 않겠다는 뜻에서 안~나로 지은 것이다.
대체 집이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집은 시간의 흔적(痕迹)으로 한 켜 한 켜 쌓아올린 기억의 탑이다. 아껴 만졌던 나무가 있고, 들창을 열고 바라본 하늘이 있고, 그 그늘에서 나고 자란 자식의 기억이 차곡차곡 서린 곳” 그곳이 바로 집이다.
우사(尤史) 선생께 글귀 두 편을 써 달라고 부탁하여 표구를 해두었다. 구상(具常) 시인의 “꽃자리”와, 『돌에 새긴 생각』학산당(學山堂) 인보(印譜)에서 따온 “모자라는 덕(德)은 쌓아 보태고, 없는 복(福)은 아끼고 아끼리” 다른 좋은 글귀도 많다. 하지만 이만한 내용이면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충분히 담겨있다.
다산(茶山)의 하피첩과 매조도(梅鳥圖)가 생각났다. 홍씨(洪氏) 부인이 빛바랜 치마폭을 손질하여 보냈는데 색(色)도 바래고 너무 낡아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한하고 있다. 하피첩에는 근검(勤儉) 두 글자를 써서 자식들이 등불로 삼도록 훈도(訓導)했다. 그리고 시집갈 딸에겐 매화(梅花)와 새를 그려 화제(畵題)를 부쳐 둔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일왕(日王)에게 시집갈 딸의 혼수로 오동나무 장(欌)하나만 보냈다던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자식들에게 더 해줄 것도 없는 처지라 집을 샀다는 낭보(朗報)에도 마음 한 구석이 허(虛)하고 짠하다.
<다산, 정약용이 딸에게 보낸 "매조도" >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奚止奚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賁有實
훨훨 새 한마리 날아와 뜨락 매화나무에 앉으니
진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 사랑스레 찾아왔도다.
이곳에 머물고 둥지틀어 즐겁게 살자꾸나
꽃피어 만발하면 열매도 또한 풍성하리.
*정약용이 18년 동안 강진 유배생활을 하던 중 아내는 일곱 폭의 치마를 보냈다.
이에 정약용은 이를 가위로 잘라 딸에게는 그림을 그려 보내고
아들에게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봄날 꽃이 활짝 핀 매화가지에 날아와 앉은 새를 그려,
시집간 딸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다.
<꽃자리>-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공초 오상순 시인이 동료 문인들에게 늘 하던 말을 모티브로 구상 시인이 썼다는 시다.
오상순시인은 사람들을 만날때면 언제나 성심껏 악수를 하면서,
"반갑고,고맙고,기쁘다." 란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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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Sweet Home’ - Roger Wagner Chor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