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이야기

고구려유적 풍수 답사

LBA 효성공인 2018. 10. 15. 18:37

고구려유적 풍수 답사

 

 

고구려유적 풍수 답사 여행은 드넓은 만주 벌판과 산맥들을 장시간 차량으로 이동하고 넘나드는 여정의 연속이었다. 차창 밖에는 이따금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처녀 명당들이 수줍게 생기를 흩날리며 필자를 유혹하며 빠르게 사라지곤 하였다. 아마도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소유하는 뿌리 깊은 공산 내셔널리즘의 영향으로 지난 역사 속에서 성행하였던 풍수지리 개념을 잊고 사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대체로 산을 의지하며 앞에 너른 들과 물길을 보며 마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풍수의 대원칙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이론만은 충실히 따르고 있는듯하다.

 

우리나라의 산야에는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 음택(산소)을 조성하였으나, 이곳 차창을 스쳐 가는 풍경 속에서는 묘를 전혀 볼 수 없었다. 현지인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여기의 장례문화는 철저한 화장문화라고 답변한다. 묘 없는 산야의 풍경이 일말의 순수함과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농촌 마을과 주택의 배산임수

 

빈부 격차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서도 탈농촌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특히 산간지역에서 농촌을 등지는 일이 많다는데, 이곳에서는 원하는 만큼의 소득을 올리지 못하니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리는 현실이 당연하리라 본다.

 

도시와 농촌의 빈부 격차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요즈음 해를 거듭할수록 경제 성장이 차츰 둔화함에 따라, 장차 발생할 도시 실업자 수의 증가로 인한 사회 문제가 이 나라 정부의 딜레마로 대두하고 있다. 그 결과 범세계적으로 자국의 경제활동 영역에 대한 파이를 극대화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의 순환을 중시하는 풍수 인으로서 좀 의아한 광경을 내내 접하였다. 이상하리만치 농촌의 집들이 모두 붉은색 일색으로, 설령 관()의 통제를 받는 건축이라고 할지라도 좀 지나치다는 인상을 받았다.

 

붉은색은 오행이론으로는 불()의 기운을 나타내며, 주변의 농경지와 산림의 푸른색은 오행상 나무()의 기운으로서 목생화(木生火)이다. 즉 주변의 나무가 타서 불의 기운을 북돋운다는 행의 법칙이 있어서는 합당하지만, 결국 붉은색의 기운은 화생토(火生土)로서, 집의 기운을 땅에 지속해서 빼앗기는 순환 작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도시의 건축물들은 백색 내지는 연한 회색이 대부분으로 백색은 오행상 금()에 해당한다. 토생금(土生金)으로 땅이 집을 생 하고 북돋우는 기운의 순환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농촌의 집들도 땅의 기운을 받아 생()하고 왕() 할 수 있게 여러 색채로 쓸 수 있도록 하면 기의 순환이 원활해지고 보기에도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현재의 기의 작용이 도시와 농촌 간 빈부 격차를 벌리는 한 원인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상념을 내내 떨칠 수 없었다.

    

도시의 건물

 

옥수수밭이 대부분인 벌판을 장시간 이동하면서 얼마 전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풍수 수강생 중 한 분이 중국과 같이 산이 없고 드넓은 벌판만 있는 곳에서는 무엇을 보고 풍수를 판단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였던바, “물길을 보고 판단합니다. 한치가 높은 곳은 산으로 보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낮은 곳을 물로 봅니다.”라고 답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옛날 선사께서 먼저 물을 본 후 나중에 산을 판단하여 땅의 길흉을 헤아려라.”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산보다 물길이 먼저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재물인 물로 이루어진 벌판에 사는 모습은, 산골짜기와 비탈에 사는 사람들의 빈한(貧寒)한 모습과는 다른 풍요로운 모습이었다.

 

압록강 변의 풍수지리

 

6.25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진주를 막기 위하여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철교를 미군이 폭격으로 파괴하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서 관리하는 철교 남쪽 부분만을 정확히 파괴하였던 결과로 중국 쪽 철교만이 남아 관광 자원이 되고 있었다.

 

반파된 철교를 관망하는 한편, 압록강과 같은 큰물 주변의 풍수지리에 대하여 동행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서울의 동작동 국립묘지는 한강의 거대한 수살(水殺)을 받는 반궁수(反弓水)-물이 둥글게 흐를 경우 그 바깥쪽을 말하는데 풍수적으로 흉지로 본다-자리에 있으니 명당이 될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국립묘지 깊숙이 한강과 거리를 두어 수세(水勢)가 완충된 후 천하명당인 창빈안씨 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앞의 안산 또한 수살을 막고 있으므로, 조선 선조 이후 왕들이 모두 창빈안씨의 후손일 정도로 명당을 이루는 것이다.

 

한편 1960년대 이전의 한강 변 모습은 장마철 상습 침수와 거대한 한강의 수살을 이기지 못하고 한낱 경작지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중장비의 발달과 치수에 힘써 지금은 대한민국의 부()가 한강 변에 몰려있다 할 정도로 변모하였다. 즉 한강의 둑과 도로 등을 건설하여 수살을 막아 강변의 기운을 명당으로 바꾸었다 하겠다.

 

위와 같은 이치로, 압록강 변의 아파트에 대하여 풍수 지식에 목말라하는 현지인들에게 풍수적인 해석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의 한강 못지않은 강폭과 풍부한 수량을 가진 압록강이었다. 따라서 강변에 바짝 붙여 지은 고층 아파트들의 경우에는 되도록 고층을 선택하여 살 것이며, 저층의 경우는 강한 수살을 견디지 못하는 결과로 거주에 부적합한 이치를 설명하였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단동에서 제일 비싸다는 아파트는 압록강의 살이 완충되도록 강변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리하고 있다. 바로 앞에 펼쳐지는 강한 기운의 수변 전망보다는 그 기운을 중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작용이 더 중요하니, 새삼 풍수지리의 오묘함을 생각하였다.

    

단동의 최고가 아파트(화살 표시)

 

강 건너 북한의 신의주는 몇십 년 전까지도 단동 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화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의 지형을 연상케 한다. 신의주 쪽은 요대수(腰帶水)-그 지역을 감싸고 흐르는 것으로 마치 허리띠와 같은 모습이다. 명당의 요건 중 하나이다-이고 단동 쪽은 반궁수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이념에 따라 통제받는 땅은 풍수의 이치를 적용할 수도 없으니 그저 착잡한 심정일 뿐이다.

 

번창하는 단동 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신의주의 풍경이 일말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나 거대하게 번창하는 도시의 면모를 갖추리라고 위안 삼아 바라보았다.

 

오녀산성과 졸본성

 

단동을 뒤로하고 한참을 이동한 후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 이르니 멀리 웅장한 자태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 모습을 드러낸다. 환인현 북쪽에 있는 이 성은 고구려 시대의 왕성인 졸본성(卒本城)의 방어용 산성(전투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시의 도성(평지성)인 졸본성은 아마도 오녀산 동쪽의 환인댐 수몰 지구 일대로 추정한다.

 

고구려는 항상 도성을 평상시 사용하는 평지성과 전시에 사용하는 전투 성으로 구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녀산성은 높은 하늘에서 보아 다섯 여자가 치마폭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기원전 34년쯤 비류수(沸流水)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한 곳으로 해발 약 800m이며 동서 폭, 300m, 남북 약 1,000m 규모의 성이다. 90 도에 가까운 절벽의 높이만도 200m나 되는 험한 산이다. 대부분 수직에 가까운 절벽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이루었으며 일부분은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정상부에는 항상 물이 솟는 샘(天池)이 있어 상시 거주하기에도 별다른 불편이 없는 곳이다.

 

오녀산성 지형을 달리 묘사하면 성의 총 둘레 중 인조성벽은 12%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이 자연성벽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높고 험준하였으며, 그 위용을 보아 일말의 신비감이 드는 곳이었다.

    

오녀산성

    

천지

 

산성 정상부에서 발견한 특이한 점은, 길이 13.5m 5m 규모의 왕궁유적지로 추정되는 집터에는 주춧돌만 7개가 남아 있는데 정확히 터 중앙에 소규모의 혈이 맺혀있음을 감지하였다.

 

험준한 높은 곳에 혈을 맺었다는 점이 경이롭기도 하지만, 2,000년 전에도 풍수지리의 꽃인 혈 처를 유감없이 건축에 활용하고 있음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번 답사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상부의 왕궁유적지 혈처

    

환인현 전경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은 후한(後漢)의 군현(郡縣)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긴장감과 동부여(東夫餘)의 압박을 받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30여 년 만에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 22년 도읍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자취를 따라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로 향하였다.

 

집안시는 분지로 공기가 정체되어 매우 더운 지역이라 한다. 이곳도 뒤로는 산맥을 등지고 앞으로는 압록강이 환포하는 배산임수의 전형(典型)을 지키고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였다는 지형에 걸맞게 분지를 조밀하게 둘러친 산맥과 수 없는 삼각형 봉우리들을 보며 저 수 만큼의 인재들이 고구려 역사를 빛내고 엮어 나갔을, 것임을 상상하였다.

    

집안시 주변의 산맥

 

오회분(五盔墳) 오호 묘

 

오회분은 고구려 석실 봉토 무덤(石室封土墳)으로 귀족의 무덤이라고 한다. 집안 분지 중앙에 투구 모양의 고분 5기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서 오회분이라 부른다. 오호 묘는 오회분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봉분 외형은 보통의 둥근 금형 체에 상부가 뾰쪽한 형태를 띠고 있다. 지하는 현실(玄室)로 가는 긴 통로 부분과 현실로 나누어지는 외방 무덤 형태이다.

 

통로의 벽면을 비롯한 현실의 사방 벽과 천정 등 화강암에 직접 벽화를 그렸는데, 통로에는 역사도(力士圖)를 그리고 현실의 동 벽에는 청룡, 서 벽에 백호, 남벽에 주작, 북벽에 현무 등 사신도를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렸다. 또한, 천정에는 별자리와 청룡과 백호를 묘사하였다.

 

즉 사신도 및 청룡 백호 등의 그림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풍수지리를 상당히 신봉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오호 묘 봉분

    

오호 묘 내부 벽화

 

오호 묘에서 현재 우리의 풍수적인 관념과 비교해볼 사료가 있었다. 현실 바닥에는 세 개의 관대(棺臺, 널 받침)를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놓았는데, 망자를 중앙에, 망자의 우측에 부인, 그리고 좌측에 첩()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필자의 경험으로 비추어, 하나의 봉분 안에 둘 이상의 부인을 안치하는 경우, 비록 죽은 자이지만 산 자와 똑같은 심리 상태에 처하게 되어, 두 부인 간의 질투와 시기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후손에게 흉사가 끊이지 않음을 자주 보아온 터이다. 오호 묘의 자손을 추적 조사하기가 불가능하니 잠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상념에 잠길 뿐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오회분 일대는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오호 묘 현실 바닥의 깊이를 3~4m로 지나치게 깊게 하여 땅속의 생기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생기를 현실 바닥의 윗부분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땅속을 흐르는 생기에 대한 심천(深淺) 구분설이 있다.

 

땅이 높고, 거칠고, 날카로운 곳은 생기 맥이 지표로부터 깊은 곳에 있어 그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아 보이지 않으니 여성에 비유하여 음산(陰山)이다. 음산은 움직임이 적으니 정적이다.

 

반대로 낮고, 곱고, 부드럽고, 평평한 곳은 생기가 지표 가까운 깊이에서 흐르니 활발한 움직임이 있어 남성적이라고 하여 양산(陽山)이라 한다. 즉 평평한 곳은 물로 보며 물은 일정한 형태가 없고 변화가 많으니 동적이다.

 

이렇듯 일반 상식적인 사물의 성상과 풍수의 성상 관념은 정반대이다.

 

따라서 평지에 있는 오호 묘가 생기에 충분히 접할 수 있도록, 흙 깊이가 얕은 묘실을 만들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광개토대왕비

 

길림성의 집안시(集安市) 통구(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장수왕 2(AD414)에 세웠으며 높이 6.39m로 무게가 37톤에 달한다. 비문은 예서체(隸書體)로 사면에 걸쳐 총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 내용은 고구려 왕의 계보 및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대왕의 업적, 왕릉을 지키는 사람(守墓人)에 대한 규정 등 대략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비문이 발굴 당시 일부 소실되었으며, 일부는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변조되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즉 일부 비문의 해석을 ()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는 일본 측의 주장으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견해로 왜가 신묘년에 침략한바, (광개토대왕)이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한다. 비문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이며, 당시 실제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왜가 당시 이웃 나라를 침공할 만큼의 국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함이 정설이다.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비는 농부에 의해 발견되고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처음 발견된 위치와 다시 세워진 위치가 같은 장소인지는 추적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지금 위치의 비각으로 대왕릉의 뒤편 소조(小祖) 격인 산으로부터 오는 기맥이 한 가닥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

 

대 왕비에서 가까운 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다. 이번 답사의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가 대왕릉의 풍수적인 고찰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왕릉은 집안 분지의 주혈(主穴), 있었다. 대왕릉을 중심으로 한치의 허술함이 없이 빙 둘러싸며 기의 허실을 막고 있는 산맥이 일품이었다. 그것도 무수한 삼각형의 산들이 집안 분지를 둘러싼 산맥의 정상부를 이루고 있어 기라 성 같은 인물의 배출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한, 집안 분지를 주관하는 소조 산(主山)-그 일대의 국을 주관하는 산-이 북서쪽에서 유정하게 국()을 감싸며 생기 맥을 보내고 있었다.

 

대왕릉은 하부 한 변(基壇)의 길이가 66m 정도로 웬만한 작은 동산 규모이다. 특이한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오호 묘 등 귀족 묘는 지하에 묘실을 조성하였음을 보았는데, 신분 차이를 두어 왕의 묘실은 봉분 윗부분 지상 높은 곳에 있게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대왕의 묘실은 봉분의 상부에서 집안 분지 전체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광개토대왕릉

    

광개토대왕릉 현실 입구

 

집안 분지의 주산에서 출발한 생기 맥은 넓은 대왕릉의 기단을 충분히 감싸는 혈권을 형성하며 맺혀있었다. 그것도 필자가 과거 본 적이 없는 직경 70~80m 이상의 광혈(廣穴)이었다. 과거 경험한 바로는 서울 경복궁의 교태전 마루에 그 중심을 맺은 혈로 그 지름이 약 25~30m 혈권이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쌓은 졸본성을 불과 30여 년 만에 뒤로하고 국내성으로 천도한 명쾌한 이유를 궁금해하였으나,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대왕릉의 거대한 혈과 조밀하면서도 수려한 산세에 끌려 천도를 감행하지 않았겠냐는 추측을 해 본다.

 

장수왕릉

 

전술한 광개토대왕릉과 아들의 묘인 장수왕릉은 일찍이 내부 유물을 모두 도굴당하였으므로 그 소재를 모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화강암을 가공하여 7단의 계단식 피라미드형으로 장수왕릉을 쌓았는데, 정사각형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3m, 높이 약 13m이다. 묘실(墓室)이 피라미드 구조의 상부에 위치하였으며, 최상부에는 원래 정자가 있어 제사 등 행사 시 혼유(魂遊)-혼이 묘실에서 나와서 노닐고 머문다는 뜻-를 위한 장소이었다 하나 지금은 없는 상태이다.

 

당시 기단을 쌓은 돌은 인력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육중한 바위로,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바위 하나하나를 끌어 올려 쌓았다고 한다. 또한, 바위와 바위 사이를 45도 물림 구조로 가공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견고한 구조를 갖추었다.

    

장수왕릉과 상부 묘실

    

장수왕릉의 기단 돌 45도 물림 구조(원형 표시)

 

장수왕릉은 집안 분지의 동쪽 고지대에서 서쪽의 파구처인 압록강의 물 빠지는 곳을 보고 있으니 풍수 이치에 맞지 않는 향()을 하고 있었다. 소위 풍수 용어로 권렴수(捲簾水)로서 물이 지속해서 빠져나감과 같이 부()와 귀()의 기운이 쉼 없이 빠진다는 흉한 향이다. 아마도 부친인 광개토대왕을 극진히 사모하여 대왕릉을 바라보는 방향을 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여기에서도 뒷산으로부터 오는 생기 맥이 왕릉으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동쪽에서 넓게 서쪽으로 갈수록 좁아 드는 사다리 형태로 북쪽 기단 부분을 폭 2.5m 정도의 상당한 강도의 수맥이 지나고 있었다. 수맥이 묘실로부터는 거리를 두고 비켜 흐르니 중앙 부분 묘실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겠지만, 뒤편 기단의 가운데 지지 돌이 유실되었고 기단의 북쪽 부분이 원래의 모습에서 흐트러져 있어 서로의 결속력을 잃고 있는 모습이었다.

    

후면 우측의 기단 돌 이격 현상(수맥 영향)

 

환도산성

 

전술한 바와 같이 고구려는 후한(後漢)의 군현(郡縣)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긴장감과 동부여(東夫餘)의 압박을 받아왔던 연유로, 고구려 졸본성의 위치가 편안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도읍의 건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압록강 변의 집안 지역을 경제, 군사 및 풍수적인 면에서 매력적인 신도읍지로 선택하였을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고구려가 건국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천도 당시에는 우선 전투 성인 환도산성(丸都山城), 일명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을 축조하였다. 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 2.5지점의 환도산(丸都山)에 있는데, 산성 주위를 산맥이 중첩하여 둘러싸고 있어 매우 험준하며, 산성 안에는 대규모 건물터 등 당시의 왕성 유적이 발굴되었다.

 

전투 성인 환도산성을 건설한 이후, 압록강 변의 집안 분지에 국내성을 축조하고 평상시 왕도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중국 측에서 유적 발굴 및 복원사업을 한다는 명분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선조들의 국토를 후손들이 지키지 못하고 타국인들의 손에 유린을 당하는 것 같아 부끄러움과 비통함이 앞설 뿐이다.

 

국내 성터(평지성)

 

풍수무전미(風水無全美)라 했던가. , “풍수에서는 지상낙원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땅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국내(평지) 성터

 

고구려가 그토록 무리한 천도를 감행한 집안 분지이지만, 이곳도 동쪽의 고지대에서 서쪽의 저지대를 향하여 물과 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소위 권렴수라는 지형적 단점을 안고 있다. 즉 파구처(破口處)-물이 흘러나가는 곳_가 허술하여 취약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릉을 기준으로 보면, 북쪽의 내룡(來龍), 남쪽의 조산(朝山)과 안산(案山), 동쪽의 청룡(靑龍)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모습이다. 그러나 유독 압록강이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백호(白虎)의 허술함을 비보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풍수적 해석으로, ()은 주인공격이고, 북쪽 내룡(來龍)은 조상과 가문의 유래에 관한 상징이며, 왼쪽의 청룡은 남자(장남), 자손 번창, 권력과 지도자의 기운을 나타낸다. 이곳에서도 장수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의 왼쪽 청룡 방향에 위치한다. 또한, 앞의 조산은 부인, 신하, 거래처, 이웃 나라를 상징하며, 우측의 백호는 재물, 여자(/며느리), 차남/차손(次孫)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백호 쪽 파구처의 허술함을 보완하는 동시에, 외적의 침입을 저지할 목적으로 평지성인 국내성-성벽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보다 약간 긴 형태-을 축조하였음을 추측해본다. 집안 분지 전체 지형을 보면, 고구려가 축조한 국내성터는 현재 그 흔적만이 남아 있지만, 그 위치는 화룡점정(畵龍點睛)-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뜻함-에 비유될 만큼, 424년간 년 도읍지의 부족한 땅 기운을 보완하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집안 시의 번화한 지역 역시 국내성터와 어울려 형성되고 있었다. 분지의 지형 중 낮은 곳으로 모이는 지기의 영향으로 시가지가 번창하며 고대의 유적과 병존하는 모습이다.

    

집안 분지 약도

    

고구려 평양성 지도

 

국내성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를 하였다고 하나, 평양성에서의 기간은 586~668년으로 불과 83년간 나라를 유지하다가 멸망하였다.

 

집안 분지는 기가 쉽사리 새나가지 않는 지형조건이지만, 평야 지대인 평양성 부근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물길-로 이용하는 방어 성곽 구조로 지기가 흩어지는 지형이다. 또한, 평양성이 보통강과 대동강의 합수 지점이며 요대수이긴 하지만 성 배후가 허술하여 파구처를 향으로 해야 하는 불리한 지형의 도읍지이다.

 

그래서일까, AD3~427, 국내성 도읍 420여 년 동안이 고구려의 최전성기였으며 최장 도읍지였음을 돌이켜 봄도 풍수적인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역사(歷史)는 역사(逆史)?

 

언젠가 유럽의 선진국 여러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받은 문화적 쇼크를 돌이켜 본다.

 

꽤 여러 나라가 약소민족에게서 약탈-헐값이라도 대가를 주고 가져왔다고 항변한다-한 유물들을 유수 박물관에 보란 듯이 전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떤 곳은 그 물품들을 모조리 빼고 나면, 별 볼 일 없는 박물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또 몇몇 강대국들은 문화와 사회생활의 중심인 광장에 거대한 탑-고대 신전 기념비를 말함. 약소민족에게 대가를 주었다지만 마찬가지로 약탈품에 다름, 없음을 세워두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나라는 약소국 사람을 가두어 동물 취급하며 사람들에게 전시하였던 사건이 있었다.

 

유물과 유적을 보존과 복원 등 명분으로 비공개한 후, 어떤 위/변조 행위를 자행하는지 걱정이 앞선다.

 

성곽 중 어떤 곳은 보수와 복원을 핑계로 출입을 막고 성문의 구조를 반대로, 바꾸는 공격과 수비 방향에 대한 위변조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인류 역사 또한 대부분 이처럼 조작되고 왜곡된 거짓이지 않겠는가.

 

힘의 논리로 진리를 꾸미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소아병적 탐심(貪心)이며, 공통의 역사 통찰 기준을 거스르는 역사(逆史)임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끝으로 사람들은 풍수 개념을 조상 산소 또는 가옥과 집터 등과 연관하여 좁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 발전시켜야 할 풍수지리학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교훈을 준다. 역사를 지킴은 나라를 지킴이다. ‘풍수지리그것은 결과적으로 역사 지킴이역할도 훌륭히 수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