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채무국 불평등 키웠다” 반성문
80년대 남미 외채위기 닥치자
구제금융 주며 신자유주의 강제
자기반성인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달 27일 보고서 하나를 내놓았다. ‘신자유주의는 과대평가 됐나(Neoliberalism Oversold)?’였다. 4페이지에 불과한 보고서였다. 지은이는 조너선 오스트리 IMF 리서치센터 부소장 등 3명이었다. 늘 그렇듯이 보고서엔 선과 막대그래프 4개가 곁들여져 있다. 분석의 엄밀함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훌륭했다.
보고서 핵심은 간명했다. 오스트리 등은 “신자유주의 몇몇 정책은 경제성장을 이끈 게 아니라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이는 다시 지속적인 성장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일방적으로 신자유주의를 공격한 게 아니다. 글로벌 교역의 급증 등 강점도 꼼꼼하게 소개했다.
IMF는 짧게는 1980년대 초 이후 신자유주의 교리의 첨병이었다. 시장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바탕으로 규제완화, 공공지출 억제, 민영화, 경제개방 등이 IMF가 앞장서 퍼뜨린 키워드였다.
그랬던 IMF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내놓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영국 가디언지의 수석 경제평론가인 아디차 차크라보티는 지난달 말 칼럼에서 “내부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보고 있다”고 평했다. 실제 IMF 보고서가 신자유주의 종말을 의미하는지는 논란이다. 하지만 안에서부터 파열음이 나오는 건 분명하다.
| 멕시코·태국·한국에도 가혹한 요구
“경제체력 고갈시키는 처방” 비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같은 비판가들은 “워싱턴 컨센서스는 신자유주의 국제 버전이다”고 말했다. 미국이 궁지에 몰린 나라에 IMF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신자유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워싱턴 컨센서스를 강제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컨센서스의 또 다른 이름은 ‘IMF의 정책 준수조건(Conditionality)’이다.

톰슨로이터는 “IMF 보고서를 계기로 준수조건도 바뀔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라고 전했다. 실제 그렇다면 거의 30여 년 만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란 말은 89년에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정책 내용은 7년 전인 82년 처음 만들어졌다. 남미 외채 위기가 한창이던 때다. 그때 월가 등 세계 금융권이 패닉 상태였다. 씨티·JP모건·바클레이스·스미모토·도이체방크 등 각국 시중은행이 남미 등 개발도상국에 빌려준 천문학적인 돈을 떼일 판이었다.

미 금융저술가인 론 처노는 『금융제국 JP모건』에서 “그 조건엔 금융인들의 통념이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행위를 ‘죄악’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게으르고 방만해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여긴다. 징벌적 제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신자유주의 정책 교리가 빠르게 남미 지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이전까지 신자유주의는 영국과 미국에 국한됐다. 남미에서 처음으로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나라는 칠레였다. 칠레는 앞장서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각종 긴축과 함께 시장개방·규제완화를 실시했다. ‘신자유주의 아버지’인 고(故) 밀턴 프리드먼은 82년 칠레 사례를 ‘경제적 기적’이라고 환호했다.

전파속도가 빠른 만큼 반발도 거셌다. 비판자들 사이에선 워싱턴 컨센서스가 ‘워싱턴 음모’와 동의어로 쓰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개념을 처음 만든 영국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은 나쁜 의미로 워싱턴 컨센서스란 말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짧은 역사’란 보고서에서 “89년 미 의회 증언에서 ‘워싱턴 컨센서스가 채무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윌리엄슨은 미 재무부·IMF·세계은행 사이에 정책적 합의(컨센서스)가 이뤄진 처방이란 의미로 워싱턴 컨센서스를 썼다. 이 말을 처음 발표한 곳도 미국 주류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하지만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 말한 것처럼 “용어나 개념, 기관은 곧잘 개발자나 설립자의 뜻과 상관없이 쓰이기 마련”이다.
| 작년 그리스 ‘디폴트’ 사태가 계기
IMF ‘재정지출 확대’로 방향 틀어
워싱턴 컨센서스는 변종을 낳기도 했다. ‘베를린 컨센서스’다. 독일이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 등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처방한 긴축 처방을 부르는 말이다. 워싱턴 컨센서스처럼 베를린에 있는 세 기관이 합의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독일이 그리스 등에 요구한 이행 조건은 원조인 워싱턴 컨센서스를 능가한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리스 채권 금융회사 이익단체인 국제금융협회(IIF) 찰스 달라라 전 회장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는 “내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그는 선과 악을 상징하는 천장 그림을 가리키며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라는 악의 편’이란 식으로 말했다”고 전했다.
마치 80년대 초 남미 채무국을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나라라고 질타한 월가의 사고방식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달라라 전 회장은 “경제 문제를 지나치게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는 오류”라고 평가했다.
지나치면 꺾이는 법이다. 결국 베를린 컨센서스는 모태인 워싱턴 컨센서스가 방향을 트는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IMF가 가혹한 긴축에 반대하고 나섰다. 빚 탕감도 외치며 나섰다. 심지어 지난해부터는 “그리스 채무를 삭감해주지 않으면 구제금융에 더 이상 돈을 대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를 두고 가디언지는 “IMF 구성원이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 사이에 간극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구제금융을 주면서 여전히 가혹한 이행 조건을 제시하지만 이런 논리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IMF는 지난해부터 부쩍 ‘성장을 위한 공공투자(재정지출 확대)’를 외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회의나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성명엔 어김없이 재정지출 확대가 첫 번째나 두 번째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IMF 변화의 증상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던 셈이다.
이번 IMF 보고서는 2009년 그리스 사태 시작 이후 IMF가 보여준 변화의 종합 정리판 격이다. 그렇다고 IMF가 순식간에 반대쪽으로 달려가지는 않을 전망이다. 보고서를 쓴 오스트리 부소장은 “섬세하게 균형적인 접근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도 불평등을 치료하기 위한 재정정책을 강조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교육투자 확대 등이다.
보고서는 의도했든 아니든 경제상식 하나를 사실상 폐기했다. ‘긴축·개방·자유화 등(신자유주의 개혁)을 하면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 경제가 성장한다’는 상식이 무너지고 있다. 대신 IMF는 “성장보다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