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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대건축의 실패와 미래의 시공간

LBA 효성공인 2016. 11. 25. 19:44

현대건축의 실패와 미래의 시공간(2)

 

김 영 수

(주)건축국 종합건축사사무소/대표이사

 

 

 

 

․ 건축사 ․ 시공기술사

․ 명예건축공학박사

전) 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전) 건교부 중앙기술심의위원

중앙도시계획위원

자연은 더 이상 무서움과 두려움이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그 건축적 언어로 원용한다.

인간은 이제 부정과 근심의 화신이 아니라

즐거움과 긍정적임을 그 디자인 언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문화는 더 이상 의심과 논쟁을 제거하고

영원과 사랑을 그 계획적 언어로 탐구한다.

자연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즐거움의 분신이며,

그리고 문화야말로 영원함의 대명사이다.

 

 

 

 

근대건축은 과연 실패작인가?

 

  20세기를 전후해서 근대 산업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큰 문제는 도시의 환경파괴와 주택난 해결이었다. 일찍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도시인구는 집중화, 과밀화의 연속이었고,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그 이후 보편적 이성과 합리적 주체 그리고 역사적 진보라는 이른바 계몽주의적 시대 사조로 발전되었다.

  이들 두 혁명은 결과적으로 신의 섭리를 따르던 중세사회를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사회로 바꾸어 놓았다. 근대는 바로 이성의 시대이다. 따라서 이성의 원칙에 따른 합리성을 존중한다. 근대성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라는 말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요약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새로운 건축이념에 따른 근대 건축운동이 전개되었다. 과거의 양식적 건축을 배제하고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명쾌한 기능적 건축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근대건축의 3대 영웅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르 꼬르뷔제, 독일의 미스 반델로에,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이 운동을 주도한 건축가들의 중심인물이었다.

  르 꼬르뷔제는 집을 ‘살기 위한 기계’로 규정지었고, 라이트는 유기적인 건축을 역설했으며, 미스반델로에는 유리상자와 유니버셜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역사의 유형을 거부하고 새로운 건축 환경을 창조하여 인간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건축적 이상의 도시 모델로 확장된 르 꼬르뷔제의 ‘3백만을 위한 도시’ (1922년)는 그 절정이었다. 우후죽선처럼 솟아오르는 고층 건축물들과 때를 같이한 아파트의 주거양식은 기능적이고 획일화된 국제주의 양식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전원도시를 빙자한 신도시의 개발과 슬럼화된 기존 도시의 재개발에도 다시금 불이 붙었다.

  끝내는 샨디갈이나 브라질리아와 같은 신도시들이 실패의 상징처럼 등장하게 된 시기이다. 역사적 환경적 개념들이 오도되고 전도된 국제적 기능주의의 산물이었다.

  사족 같지만 우리나라의 주거형태와 도시공간도 근대의 국제주의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시행착오의 표본이라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역사적 맥락과 전통적 양식들이 무시된 채 오히려 그릇된 도시, 잘못된 건축을 답습하고 있는 형국이 더욱 안타깝다고나 할까. 특히 조그만 반도를 뒤덮고 있는 아파트의 열병식과 높이 경쟁은 그야말로 가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과연 근대건축은 실패작이란 말인가? 성공작이 아니기에 실패작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일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근대건축의 공적이 너무나 위대한 것이기에, 비평적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불행일 정도의 가혹한 비평적 어휘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위대한 공적이란 다름이 아니다. 거장들을 비롯한 무수한 건축가들이 이론과 창작을 통해 참다운 건축의 이상들을 실천하려고 쏟은 그 정열과 노력이 너무나 컸다.

  근대건축의 실패라는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건축이 절대적일 수 없는데도 그 저변을 형성하는 경제나 정치까지 뛰어 넘어 이 사회 속의 모든 병리현상까지 책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건축을 사회진보의 중심논리로 우뚝 세우지 못했느냐는 건축내부에서의 도전적 사고와 사회적 책임을 추궁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모순과 사회의 갈등을 건축이 전적으로 부담하기엔 실제 역부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건축가와 비평가들이 근대건축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고 나선 것도 또한 사실이다.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필립존슨은 “근대건축은 실패작이며(…) 오늘날 우리의 도시는 50년 전보다 더 흉하게 되었다”고 했고(1968년), 영국의 저명한 건축가 제임스 스털링은 “근대건축의 99%는 따분하고 진부하고 매 말랐으며, 옛 도시에 놓였을 때 대체로 분열되고 부조화스럽다”고 했다(1974년).

  여기에 마치 결론처럼 첨가한 사람은 독일 태생의 피터 블레이크였다. 1977년 그의 저서에서 근대건축과 도시의 금과옥조는 결국 환상에 불과했고 결과적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될 시행착오를 저질렀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앞에서도 조금은 언급했지만 비평적인 현상과 관점에서는 당연한 논리와 주장이라 하더라도, 건축의 전반적인 현실과 사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더욱이 그 무수한 건축물들은 소수의 엘리트 건축가가 남기는 불후의 명작 수준만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 건축가가 서비스하는 작품 내지 상품의 영역일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평가의 안목과 건축가의 창작은 또 다른 조건이며, 거기에 건축주의 주문과 요구는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과 그래야만 하는 이상간의 괴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고대와 중세는 차치하고라도 르네상의 그 화려한 고딕과 현란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을 호화롭게 사치한 귀족적 건축이라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결코 폄하할 수는 없다.

  또 근 ․ 현대에 들어와서도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실주의가 다름 아닌 이성과 감성, 즉 객관성과 주관성간의 시대사조에 따라 오간 것을 어느 누구가 문화 비판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본다면 근대 건축운동의 눈부신 활약이 맑시즘과 실존주의 사이에서 과욕의 상징처럼 남기는 했어도, 20세기 이후의 모더니즘이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 문명 전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이었기에, 근대건축에 대한 비평 또한 예외일 수가 없이 그런 사조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럼 현대의 대안인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통칭되는 오늘의 ‘탈 근대’는 그럼 어떠한가.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는, 철학자 베버의 말처럼, 합리화의 철창, 관료주의의 철창 속에 구속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억압적인 제도의 질곡 속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극히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임슨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 리얼리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예사조의 시대적 구분을 시장 자본주의, 독점 자본주의 그리고 다국적 자본주의에 대응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코 순수한 문화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바로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고 본 것이다. 즉 다국적 자본주의의 팽창에는 문화가 지배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말이다.

문화적 산물과 소비활동 그 자체가 경제활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특히 영상과 활자 및 전파매체로 파급되는 광고와 이미지 그리고 스타일 등 문화적 생산물 그 자체가 바로 자본의 가치증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시대와는 달리 경제영역과 문화영역이 완전히 소멸됨으로써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화적 실천이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엘리트 문화주의와 예술 지상주의는 그 절대적 가치를 사실하고, 대량 소비시대와 더불어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대중문화의 시대로 급변한 것이다.

  건축이 문학이나 음악, 미술보다는 더욱 시대사조와 경제상황의 직접적 표상이 되고 있는 만큼,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사회논리와 경제논리에 얽혀 어쩌면 카오스의 단계로 깊숙이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어휘인 ‘탈 구축’이나 ‘탈 구조주의’(deconstructivism)에 대한 건축적 논리의 혼란이다. 건설 그 자체가 구축의 논리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구축의 질서를 벗어 버린다는 것이 아무리 관념적이라 하더라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직각이나 평행을 부정하고 오로지 탈구조의 무제한적 구축을 목적으로 하는 탈구조주의적 건축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현대건축의 대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한마디로 줄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담론의 방법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다름이 아니라 환경파괴의 원흉이라는 건축의 원죄를 씻는 방법은 일체의 건축을 중지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인간의 삶과 사회의 바탕을 지탱하는 건축의 최후수단일 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무리 자학적이고 자폭적인 논쟁이나 담론이라 하더라도 그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로 끝난다는 것은 오히려 철학과 건축의 진정한 방법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대변자라고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료타르가 포스트모던 상황 즉 ‘탈현대적 조건’의 하나로 내세운 역리의 원칙(principle of paralogism)으로 위의 대답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담론에 대한 합의보다는 이의, 순리보다는 역리 그리고 기존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도시키는 역설적 원칙으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대답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여하튼 건축의 장르에서도 기존의 미학적 질서가 오히려 무질서한 표현으로 대치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상황이다. 안정보다는 불안정, 조화보다는 부조화, 상식보다는 비상식이 오히려 훌륭한 창작의 포커스가 되는 것이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실제 영역임을 부인할 수 가 없다.

  미학적 논리에 따른 심미적 판단보다는 시각적 자극에 좌우되는 전향적 경향이 지금의 현실인 것 또한 사실이다. 아이젠만, 하디드에 이어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20세기의 대미를 장식한 해체주의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고, 21세기를 이끌고 있는 다니엘 리베스킨트느 뉴욕의 새 WTC 건물은 물론 서울 삼성동의 아이파크 타워까지 포함하여 현란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에 대해서 찬양일변도 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불확실하게 보이는 포스트모던 건축이 불안한 내일의 건축에 지금으로서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창출해내는 상당한 실험적 가치는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건축 내외부의 여러 여건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포스트모던 건축의 태생적, 경향적 현 상황들이 진정 오늘의 대안이라고 확신하기엔 의구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부정적 관념을 버리지 않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개인적 자유영역과 집단적 권력의욕이 과연 현대사회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 그 긍정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대안에 대한 의문의 첫째 이유이고, 현재까지 비평적 논리를 쏟아내고 있는 포스트모던 건축의 논리적 타당성과 실천적 정당성이 과연 그 건축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그 두 번째 이유이다.

  어떻든 이 두 가지 이유들은 건축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간에 포스트 모더니티가 문화와 경제를 아우르면서 수용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동시에 목표인 것만은 틀림없다.

 

건축의 문화적 가치는 시대와 사조를 초월한다.

 

  앞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건축의 불확실성과 위기의식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지만,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건축의 문화적 가치는 사대와 사조를 초월해서 영원하고 무궁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은 그 근본에서는 꾸준히 변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의 진행 속도가 시대사조를 변화시키면서 인간의 모순이 그 논리와 사조 속에 융해되고 또다시 그 시대와 역사 속에서 정제되는 과정을 거듭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는 동안 긍정과 부정의 논쟁, 회귀와 단절의 반전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음도 주목의 대상이다. 여기서는 특히 문화의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인간존재의 가장 큰 가치인 자유의 문제다.

인간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삶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허용치 않아야만 하는 이중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 형성 이래로 개인의 자유와 전체의 구속은 상반된 관계였다. 민주를 전제하는 현대적 국가에서도 오히려 법과 제도는 더 엄격해지고 세분화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과연 인간의 가장 존엄한 영속적 가치인 자유는 개인에게 귀속될 수 있단 말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문화의 목적이라면 반드시 이와 같은 이중적인 문화의 가면은 벗겨져야만 하지 않을까.

  그 둘째는 문화생활을 빙자한 자연의 훼손과 문명생활을 앞세운 자연에 대한 모독이다.

문화가 생활의 이기(利器)만을 추구하다 보면 어떠한 형태로든 자연훼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건축이 토지의 형질을 변화시키면 결과적으로 도시는 산과 강을 변경시키고 급기야는 육지의 겉, 바다의 속 그리고 공중의 모든 것까지 오염시키고 만다.

또한 문명이 과학과 기술을 앞세워 생명의 이해(利害)와 인공의 효율을 추구하다 보면 어떠한 연유에서 간에 자연의 순리를 배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문명의 속성이다. 생명공학은 가공할 그 어떤 결과를 가져오지 말아야 하며, 핵에너지는 인류 종말의 원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생태건축이야 말로 또 다른 자연 모독이 아닌 그야말로 자연의 원형을 찾는 작업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자연이 그렇게 존재하고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삶을 유지하는 한 문화는 인간과 함께 영원히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영원한 진리요 절대적 원칙이다. 어느 인류학자가 이를 부정할 것이며, 그 어느 문화비평가가 이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대목에서 자연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건축의 숙명적 가치론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자연 ․ 인간 ․ 문화 이들 삼자 사이에서 기능하는 건축의 역할이야말로 포스트모던 또는 그 이후의 사상적 체계에서 그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건축이야 말로 인간적인 삶의 진실 된 접근방법이며, 문화적인 삶의 진정한 표현수단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철학이나 사상 속에서 건축의 개념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건축의 문화적 가치는 시대와 사조를 초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무궁하고 영원한 테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건축은 자연 ․ 인간 ․ 문화가 하나된 것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 인간은 즐거운 것, 문화는 영원한 것, 바로 건축은 이

러한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영원한 것이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 요약된 말은 개인적으로는 건축관 내지 창작관일 수 있겠지만, 자연과 인간과 문화에 대한 3자 관계를 건축과 연계하여 말하는 문화적 담론으로서도 충분히 유용하리라 믿는다.

건축은 자연을 바탕으로 알고 인간을 근본으로 여기며 문화를 그 기본으로 삼는다.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건축 자체가존재할 수 없고. 자연을 거역하고는 건축이 세워질 수 없으며, 문화를 제쳐두고서는 건축의 의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은 더 이상 무서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그 건축적 언어로 원용한다.

인간은 이제 부정과 근심의 화신이 아니라 즐거움과 긍정적인 것을 그 디자인 언어로 선택한다.

그리고 문화는 더 이상 의심과 논쟁을 제거하고 영원과 사랑을 그 계획적 언어로 탐구한다.

자연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즐거움의 분신이며, 그리고 문화야말로 영원함의 대명사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도록 보전 내지 복원해야 한다.

인간은 사는 모습 그대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보호 내지는 유도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화는 자연스럽게, 인간스럽게 그래서 물 흐르듯 할 수 있도록 향상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건축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로운 창작으로 태어나고, 그 건축적 유산은 시대를 뛰어 넘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물음과 문화와 건축에 대한 해답을 끌어 내면서 끝없는 담론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건축이 자연을 그 원리로 하고. 인간을 그 목적으로 하며, 문화를 그 수단으로 하는 한, 건축의 영속성 또한 영원한 도전과 한없는 이상을 찾아나 설 수밖에 없다. 모던을 헌 것이라고 부정하고 포스트모던을 새것이라고 외쳐대는 순간, 또 다른 이상한 새로움이 들이 닥치는 문화의 속성이야 말로 건축이 영원히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다.

  건축문화의 과거는 정형이지만 미래는 부정형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형의 분석은 오늘의 시점에서는 확실한 결론을 가져올 수 있지만, 내일의 시점에서는 불확실한 미지의 바로 그것이다.

내일의 진정한 해답을 오늘의 두되가 풀 수는 없다. 내일에 가서야 어제의 가시화된 정형을 만나고 그제 서야 내일의 두뇌가 문화 분석적으로 작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일의 시대 시조가 되는 문화논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내일까지를 재단한다는 것은 오늘의 오욕인 동시에 내일에 대한 모독이 된다.

  그렇다고 순수한 학문적 차원의 내일까지를 문제시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예언자적 오만과 논리의 비약을 금기시하고 싶을 것뿐이다. 내일을 살아보지도 않고 내일의 인간을 운위하고 더군다나 그 삶 속에 내재하는 문화의 틀까지 꿰고 사조의 표피를 씌우는 것은 더욱이 안 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건축은 자연ㆍ인간ㆍ문화가 하나된 것이다.”(Architecture integrates narure, hunmankind and culture in oneness)라고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즐거움을 시간과 공간속에 영원히 이어주는 문화의 영속성이 바로 건축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축의 생명력 또한 다름이 아니다. “인간의 이상이 지식화 되고 시대화 되면서 계속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곧 문화의 본질이고, 건축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상을 담는 삶의 환경을 창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의 관계는 앞으로도 수천 년 간 계속 이어져 갈 것이다. 수천 년이 아니라 역사와 유물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인간의 생성 시점까지가 될 것이고, 앞으로의 수천 년 이후의 시대를 거슬러 내다본다면 인간의 종말시기까지가 될 것은 불문가지다.

  이와 같이 인류가 존속하고 역사가 계속되는 그 속에서 다소간 건축의 부침(浮沈)은 있을지언정, 자연과 문화가 건축의 절대언어로 영원히 살아남아 결코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 결과 마침내는 자연적 인간과 인간적 자연이 동격화 되고 인간적 문화와 문화적 인간이 동일 시 되는 사상적 초월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때는 건축적 자연이 자연의 건축이 되고 인간적 건축이 건축의 인간이 되는 논리의 무감각 시대도 도래할 것이다.

  바로 문화적 건축이 건축적 문화와 하나가 되는 시점이다. 다만 모든 장르의 예술적 사조와 학문적 사상도 이 속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저기에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시공간(視空間)이 있다.

 

  여기서 다시 사조의 혼란과 사상의 혼동 속으로 포스트모던 건축이 갈구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선상으로 돌아가 보자. 다음에 그 해답을 찾아보고 도 결론으로 넘어가 보자.

  앞서 이야기 했지만, 근대 건축운동이 너무나 찬란한 업적을 남긴 이면에는 자극적인 슬로건의 경쟁과 절대적인 독선의 경향들이 만연된 것도 사실이었다. 반대론자들은 불멸의 기념비적 건축을 남기려는 과대망상증의 환자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 불멸이라는 건축의 속성은 너무나 뚜렷한 흔적을 남기면서 부정적인 측면에서 집중조명을 받았고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도시의 바둑판식 가로 구획과 초고층 빌딩이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을 파괴해버렸다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공감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재개발의 명목으로 문화유산이나 서민주거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현장을 보고서는,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인류에 대한 파괴요 죄악이라고 비판한다. 환경문제와 경제적인 이유에서라고 한번쯤 짚고 넘어갈 사항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은 또 민주사회와 인간 척도를 위해서도 거대한 규모의 프로젝트는 중지하라는 것이고 나아가 당분간은 건축이 중단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이 대목은 분명히 비평가의 안목이고 비판자의 독설쯤으로 치부해야 될 것 같다. 건축과 함께 인류의 생존은 중단이 있을 수 없고 역사의 순리는 절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풍부한 감성적 장점만은 건축 계획적 측면이든 아니면 정책적 고려 수단이든 간에 재고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이상과 같은 비평과 나타난 문제점들은 어떠하든 수용하고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때가 포스트모던이든 아니면 포스트 포스트모던이든 간에 시대적 구분이나 명명과는 상관없는 해결점을 찾아야만 된다. 해결책의 중심에는 그들 중 일부도 말했듯이 건축교육의 대대적 개혁과 재편의 문제이다. 오늘날과 같이 산만하고 불확실한 형식과 내용으로서는 미래의 사회와 내일의 건축을 이끌어가고 책임질 수 있는 건축가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건축의 논리는 모든 학문과 예술의 종합이기에 나 홀로의 창작은 있을 수도 없고 또 그러한 거장도 탄생할 수가 없다. 오직 필요한 모든 전문가를 조정하고 지휘하는 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건축의 프로세스는 팀워크의 산물이기에 건축 그 자체의 여러 전문가들은 물론, 기계, 구조, 조경, 음향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학 심리학, 경제학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역의 전문 컨설턴트들과 협력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건축의 전 과정을 마스터한 사람이 관련 전문분야의 전문가로 다시 되돌아와야만 건축이 완전한 제 몫을 할 수 있는 단계가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발전 전략이 건축의 중심에서 짜여 지고 이를 통해 모든 산업이 문화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교육과 문화 그리고 경제 전반을 재검토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다. 건축교육의 혁신적 결과가 정책적으로 뒷받침 될 경우 건축사상의 정립 또한 병행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가 없다.

  그러면 교육의 문제는 이정도로 하고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넘어가 보자.

“자연으로 돌아가라”, “원시로 회귀하라”라는 말도 있듯이 건축의 원초적 개념은 탈 과학적이고 초문명적이다. 이 말은 자연과 인간이 일단 건축 사상의 중심에 우뚝 서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自我)와 자연(自然)과 자유(自由)를 다시 그 중심의 핵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아는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스스로의 나인 자아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서만 존재한다.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인 자유는 바로 문화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문화에는 자아와 자유가 근본이 된다.

  자연스럽게 자아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자유는 그 위에서 존재 그 자체를 향유한다. 자아는 자연 속으로 자유를 누릴 최소한의 건축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바로 살 집을 의미한다. 그 집은 자유로 가득하다. 바로 건축문화가 만개한 집이다.

이런 집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기 이전에 공동체(국가)의 책무이다.

자아가 지배하는 공동체 역시 자유로 충만해야 한다. 빈부와 차별은 물론이고 경쟁과 욕망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생활이 아니라 이상을 쫒다보니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자연은 자연히(스럽게)자연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훼손된 자연의 상처는 자아의 힘으로 치유되고 되돌려 놓아야 한다.

자아의 생명력과 자유의 구가를 위해서도 반드시 이루어 놓아야 한다.

자연은 언제나 맑고 깨끗하게 자아를 지켜준다. 물과 숲을 따라 마음껏 자유가 흐르게 한다.

이것은 도원의 가경이 아니라 바로 자아가 실현한 결과의 자연이다.

  마지막으로 자유는 자아의 또 다른 생명이다.

자아가 성취한 최고의 전리품이다. 자유의 몸은 자아이고 그 정신은 바로 자연이다. 자유를 잃은 것은 자아와 자연 모두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자유를 위해 자아가 흘린 땀은 그 얼마며, 이 자유를 위해 문화적 가치까지 소멸된(최후의 자유)그 보상은 또 어찌하랴. 더 이상 그 어떤 대가와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함의 상징이 곧 자유인 것이다.

  이상의 자아ㆍ자연ㆍ자유의 3자(自)는 다름 아닌 자연ㆍ인간ㆍ문화의 핵심적 표현이며 또 그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건축 내부의 여기에서 찾는 결론이다.

건축 외부의 또 다른 저기에서 또 하나의 정수를 찾아 마지막 결론으로 가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자의 도덕경에 있다.

  “人法地 地法天 天地道 道法自然”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또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이다.

물이 흘러가듯 법(法)의 의미는 심오하고 무궁하다. 뜻에 따르고 본받으며 의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도 있다.

  만물이 땅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듯이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땅위의 생물은 하늘의 공기와 물로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한다.

도(道)는 천지를 낳고 자라나게 하며 우주를 질서 있게 운행시키지만 결국에는 자연에 귀의하고 만다. 천지인 역시 도의 뜻에 따르고 또한 자연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또 나름대로 주목하는 것은 감히 도(道)의 중간자적 역할이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 지으며 보이지 않는 질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건축에 있어서는 바로 문화라는 매개체가 있어 자연과 인간의 고리를 이어주는 작용과 비슷한 기능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문화의 힘은 저기서의 도의 원리에서 작용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연은 초월적이어서 맞대어 볼 수는 없지만 논리는 부회(部會)해서 이렇게 짜 맞추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짧게 줄여서 도법자연의 사상에서 건축의 진리와 진수를 찾아보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고향 그곳이 바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도법자연의 시공간임을 끝까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즉 천인합일의 시공간이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지루한 포스트모던 건축에 종지부를 찍는 또 하나의 진정한 해답이다.

더불어 건축의 핵심요소인 자연ㆍ인간ㆍ문화의 논리가 자연ㆍ자아ㆍ자유라는 또 다른 논리의 틀로 응축되면서 도법자연의 시공간에서 다시 하나로 합일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 결론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큰 과제로 대두된 건축교육의 문제와 더불어 포스트모던 건축의 대안들이 도법자연의 시공간 속에서 자연ㆍ자아ㆍ자유라는 핵심적 건축언어를 재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비평의 끝은 또 다른 찬사의 시작이듯이. 부정의 끝은 또 다른 긍정의 시작이 아닌가. 실패작의 궁극적 의미는 성공작과 대치되고, 현대건축의 부정적 원인은 미래 건축의 긍정적 결과로 틀림없이 전환 될 것이다.

출처 : 월우당(月宇堂)
글쓴이 : 靑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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